Project Description

유리, 그 유용한 아름다움유리공예 작가 쯔지 카즈미 씨

컬러로 어울림을 표현해온 유리공예 작가 쯔지 카즈미 씨는 일본의 감각 있는 살림꾼 사이에서 인기 있는 생활 유리공예품을 선보인다. 빡빡한 전시 스케줄로 좀처럼 시간을 내기 어려운 그를 만나기 위해 이시키와 현의 공예 도시 가나자와kanazawa를 찾았다.

일본의 공예 도시 가나자와에서 활동하는 유리공예 작가 쯔지 카즈미 씨. 다채로운 컬러로 어울림을 표현한 컬러 시리즈는 일본 사람들이 가장 갖고 싶어 하는 공예품으로 손꼽힌다. 오는 4월 25일부터 5월 20일까지 서울 청담동 조은숙아트앤라이프스타일 갤러리 (02-541-8484)에서 열리는 <쯔지 카즈미> 개인전에서 보다 다양한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시뻘건 용광로에서 뿜어 나오는 강렬한 불꽃, 기다란 쇠막대에 매달린 유리물이 휘휘 춤을 춘다. 1500℃의 열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여 고체에서 액체로, 액체에서 다시 고체로 바뀌는 뜨거운 불덩이의 유연한 춤사위. 마치 영화 <스타워즈>의 제다이처럼 광선검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불구덩이에 넣다 뺐다, 늘렸다 잘랐다를 반복하는 이의 표정엔 변화가 없다.

차가운 유리가 언제 이토록 뜨겁고 말랑했던가. 유리공예가 쯔지 카즈미씨의 공방에 들어서니 뜨거운 열기와 차가운 공기가 공존한다. 불에 녹인 유리 원료를 대롱에 말아 꺼낸 뒤 입김을 불어 넣고 굴리고 다지고 자른 다음 불에 넣는 과정을 반복하니 뜨거울 수밖에. 반면 차가운 공기는 적막하게 느껴질 정도로 고요함이 깔려 있다. 아무 구호도 없이 스텝을 밟듯 유유히 움직이며 서로 합을 맞춰나가는 과정, 20여 분의 팽팽한 적막을 깨뜨린 건 열기를 감내하고 탄생한 영롱한 유리잔 하나다. “보통 잔 하나를 만드는 데 30분 정도 걸리는데, 파이프를 한번 잡으면 그 시간 동안은 꼼짝할 수가 없어요. 용광로에서 꺼낸 유리물이 식기 전 단 몇 초 동안 숨을 불어넣고(크기를 정하고), 돌리고(형태를 잡고), 굴리는(모양을 다듬는) 작업을 반복해야 하기 때문이죠. 조금 전에 인사를 나눌 수 없었던 건 그 때문입니다. 미안합니다. 그리고 가나자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유리에 그래픽을 입히다 공예 도시 가나자와에서 나고 자란 쯔지 카즈미 씨는 네 살 때부터 일본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림을 좋아하는 그에게 가나자와 미술공예대학 진학은 정해진 수순이었지만, 처음부터 ‘공예’에 뜻이 있었던 건 아니다. 취직이 잘된다는 말을 듣고 그래픽디자인을 전공으로 선택한 그는 졸업 후 도쿄의 패션 회사에 입사 지원서를 냈지만 고배를 마셨단다. 절박함보다 무언가 즐겁고 행복한 일을 찾기 위해 떠난 미국 유학. “뉴욕의 한 책방에서 유리를 소재로 한 전문 잡지를 봤어요.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는 스테인드글라스 작가 인터뷰가 실려 있었는데, 그의 작품을 보는 순간 스테인드글라스에 매료되고 말았죠. 빛에 따라 달라지는 색감의 농도만으로 평면이 입체가 되고, 아름다운 패턴이 되니까요.” 마침 기사 말미에 ‘제자 모집 중’이라 쓰여 있었고, 운명처럼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로 달려가 유리공예에 입문했다. 동시에 캘리포니아 미술대학 글라스과(요업과)에 진학해 불어서 형태를 만드는 분유리 (blown glass) 기법을 익혔다. 분유리는 숨을 불어넣는 과정에서 온몸의기를 모으듯 강인한 체력을 요하지만, 순간적 우연성과 작가의 손맛이 결합되어 결정체를 만드는 과정이 꽤 매력적인 작업이다. 불고 돌리고 누르는 과정에서 몸과 유리가 반응하는 미묘한 차이로 전혀 다른 형태가 완성되니 순간순간 늘 새로운 도전일 수밖에.

유학 4년 차에 접어들 무렵, 가나자와 시에서 연락이 왔다. 공예연수원 산하 유리 공방의 어시스턴트를 구한다는 소식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이때부터 컵이나 식기, 테이블웨어를 본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처음 4~5년간은 나 자신을 찾기 위한 시간이었죠.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어요. 그러다 문득 패턴을 입히고 싶었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한 것이 발상을 전환하는 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유리공예 작가로서 다양한 작업을 시도한 그는 유리에 그래픽 패턴을 도입한 맨초코 시리즈를 선보였다. 분유리 기법으로 컵을 만든뒤 그래픽 작업으로 만든 도안을 입히고 다시 가마에 구워 완성하는 맨초코 시리즈는 도트, 헤링본 체크, 스트라이프, 호피 등 마치 패션 아이템을 보는 듯한 모던한 패턴이 특징이다. 투명과 불투명을 반복하는 블랙 패턴은 내용물이 담기면 이미지가 백팔십도로 달라지면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 그를 스타 디자이너로 등극시킨 컬러 시리즈가 나온 것도 이 무렵. 마흔일곱 가지 색상 표현으로 유리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컬러 시리즈는 현재 리사이클링 아이디어를 접목해 더욱 다채로워졌다.

“2001년 한 갤러리에서 작품을 전시하자는 연락이 왔어요. 많은 사람에게 작품을 팔고 싶다고 했죠. 거기서 떠오른 것이 오미쿠지, 일종의 제비 뽑기 컵이었죠. 제가 만든 유리컵을 종이로 감싸 커다란 박스에 마구 넣었어요. 총 3백65개의 컵에 마음에 드는 단어를 하나하나 새겨 넣었죠. 컵 가격은 한 개에 4천 엔 정도였어요.” 전시는 색다른 방식으로 입소문이 났고, 어떤 관람객은 한 번에 스무 개의 컵을 뽑기도 했다. 또 ‘마음이 편안한 장소’라는 주제로 눈물 모양의 오브제를 천장에 매달아 선보였는데, 이 작품 역시 반응이 뜨거웠다. 투명한 유리는 ‘자신의 감정에 더 솔직해져라’는 메시지를 담기에 더없이 훌륭한 소재였다. 단지 작가의 사고와 철학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타인의 삶에 기쁨과 용기와 위안을 건넬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 이것이 바로 쯔지 카즈미 씨가 추구하는 예술의 본질이다.

한산한 강변길에 자리한 멀티숍 줌머 팩토리Zoomer factory. 1층은 쯔지 카즈미 씨의 유리 작품과 그가 셀렉션한 도자, 의류 등 다양한 상품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가나자와 미술공예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다양한 전시를 기획하는 쯔지 카즈미 씨는 젊은 작가들에게 전시 기회를 제공하고자 멀티숍 2층에 대안 문화 공간을 마련했다.

1 유리에 패턴을 입힌 맨초코 시리즈는 연령층에 상관없이 인기 있는 스테디셀러다.
2 만드는 것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쯔지 카즈미 씨는 공예 관련 전문지를 발행하기도 한다.
3 유약을 바르지 않은 도자는 오브제로 손색없다.

강도 높은 특수 유리로 제작한 볼 세면대가 앙증맞다.

3백65일 타오르는 불꽃 일본에서도 전통 가옥이 가장 잘 보존되고 있다는 가나자와 시. 그중에서도 쯔지 카즈미 씨의 집은 포도밭이 펼쳐진 한가로운 교외에 있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두 개의 목조 건물과 박스 형태의 콘크리트 건물은 모두 나이가 다르다. 먼저 15년전에 지은 첫 번째 건물은 1층에 공방, 2층에 살림집이 있다. 2년 후 맞은 편에 오피스 건물을 짓고, 5년 전에는 콘크리트 건물을 추가했다. 메자닌 구조로 이루어진 오피스 공간의 2층은 남편의 서재, ㄱ자로 이어진 콘크리트 건물은 게스트룸으로 사용한다. 게스트룸은 다른 지역에서 전시를 하며 인연을 맺은 친구들이 머물 수 있도록 계획한 것.

“가나자와 시는 목조 주택이 많아 주거 밀집 지역에는 공방 허가가 나지 않아요. 특히 뜨거운 불을 이용하는 유리 공방은 되도록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죠.” 용광로의 불씨를 스물네 시간, 3백65일 유지해야 하는 숙명으로 일과 생활 공간을 함께 구성한 쯔지 카즈미 씨는 살림집과 오피스 모두 설계를 직접 했다. 자연 소재를 좋아하는 그이지만 화재에 대비하기 위해 내부는 콘크리트로 마감했다. 멋진 백발처럼 색이 바랜 외장 마감재는 전나무를 켜서 사용한 것. 반려견 리크ㆍ서니와 동거하는 주거 공간은 전체적으로 내구성이 뛰어난 사이잘sisal 카펫을 깔고, 매일 아침 요가와 명상을 하는 글방은 다다미로 마감했다. 천장 대들보에는 소쿠리와 아끼는 오브제를 조르르 장식하고, 문 안쪽 자투리 공간까지 수납공간으로 활용하는 정갈한 살림 솜씨를 보니 역시 일본 주부구나 싶다. 쯔지 카즈미 씨의 그릇에 매료되어 인연을 맺은 요리 연구가 최지은 씨의 귀띔에 따르면, 그는 요리 솜씨도 수준급이란다.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활용해 즉흥적으로 요리를 만들어내는 그는 현미밥에 삶은 두부, 유부, 아보카도를 올려 한 그릇 별미를 뚝딱 완성한다. 한국 김을 구워 대충 찢은 뒤 간장을 뿌려 먹으면 밥 한 그릇 금세 비운단다.

“일과 생활이 분리되지 않아 불편한 점이 있다면 작업하고자 하는 의지, 쉬고 싶은 마음이 공존하는 것이죠. 매일 반복되는 일상은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운데, 그럴수록 2 규칙적으로 생활하려고 노력해요.
오전 6시에 일어나 니키, 서니와 한 시간 산책한 후 요가 스트레칭과 명상을 하고, 이메일을 체크하죠. 아침 식사 후 9시 30분 출근 시간이 되면 건너편 오피스에서 그날의 작업에 관한 회의를 열어요.”
3백65일 중 3백60일을 공방에서 보내는 쯔지 카즈미 씨. 작업실을 마음 편히 비우지 못하는 이유는 손끝의 감을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스케치만 하고 실제 작업은 스태프나 장인에게 시키는 경우가 많지만 그는 할 수 있는 한 오래, 지금처럼 직접 작업하고 싶다.

입김을 불어넣고 이를 다시 굴리고 다지고 자른 뒤 다시 불에 넣는 과정을 거쳐 탄생한 투명한 유리잔. 뜨거운 용광로 앞에서 아무런 구호도 없이 서로 합을 맞춰가는 작업의 진지한 모습에서 자못 비장함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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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용광로 속에서 막 나온 젤리 같은 유리물을 굴려 핀셋으로 형태를 잡는다.

마흔일곱 가지 색상으로 어울림을 표현한 컬러 시리즈. 고객이 깨지거나 사용하지 않는 제품을 보내면 녹여서 만드는 리사이클링 유리병(블루 컬러)도 눈여겨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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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도 수많은 매체와 인터뷰를 했지만 개인 공간을 공개하는 것은 <행복>이 처음이다. 15년 전 손수 설계한 집은 따뜻한 나무 소재와 북유럽 가구가 매치되어 담박한 매력이 있다. 정면에 보이는 아트월은 부엌과 공간을 구분해주는 파티션으로 쯔지 카즈미 씨가 컬렉션한 다른 작가의 작품을 진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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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액자 너머 이웃 전통 가옥의 지붕이 그림처럼 펼쳐지는 창문과 다다미로 운치를 더한 글방. 매일 아침 명상과 스트레칭을 하는 공간이다.
2 줌머 팩토리 2층에서는 리사이클링 전시가 한창이다.

전통 목조 주택을 개조한 멀티숍. 옛 건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가나자와 시는 일본인들이 손꼽는 관광도시이기도 하다.

쓰지 않는 공예품은 만들지 않는다 쯔지 카즈미 씨는 공방 근처 10평 남짓한 자그마한 주택을 개조해 줌머 팩토리라는 소품 가게와 카페를 운영한다. 일본 각 지역에서 그의 그릇을 구입하기 위해 공방으로 찾아오는 관광객을 일일이 맞이할 수 없어 판매 매장을 따로 분리한 것. 1층은 유리 숍과 쯔지 카즈미 씨가 셀렉션한 아이템을 선보이는 편집숍, 2층은 외부 작가의 전시를 진행하는 대안 문화 공간이다.
또 그는 나란히 자리한 공예 숍 30일 가게, 90일 가게의 프로듀서이기도하다. 30일 가게에서는 가나자와 시에서 배출한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90일 가게에서는 타 지역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 판매한다. 이름처럼 30일, 90일 동안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신진 작가들이 타 지역의 중견 작가와의 만남을 통해 다른 지역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주는 데 의미가 있다. 작가 선정의 기준은 쓰임, 즉 생활과 어떤식의 접점을 이루느냐가 포인트다. 그래서인지 참여 작가는 물론 지역 시민들의 반응도 뜨겁다. 또 생활 공예 관련 디자인 서적을 발행하기도 한다. 이런 일련의 활동은 궁극적으로는 공예의 생활화, 대중에게 더욱 다가가기 위함이리라. “미술 기획에서도, 작업에서도 ‘생활’을 정점으로 다양한 일을 펼치기 때문에 생활 공예가로 일컬어질 때가 많지만 사실 ‘생활 공예가’로 불리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단어 자체를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단어가 만드는 틀이나 규정에 갇히고 싶지 않은 거죠. 작가는 작품을 만드는 것에 자유로워야 하니까요.”

차라리 ‘유리집’이라든지, ‘유리를 다루는 사람’ 정도로 불리고 싶다는 쯔지 카즈미 씨.
작업이 어려워 도중에 포기하고 싶을 때 그는 부서진 작품을 간직했다가 녹여 아예 다른 형태의 작품을 만든다. 부서진 조각도 조화를 통해 훌륭한 작품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때마다 희열을 느낀다고. 비슷한 맥락으로 요즘 가장 관심 있는 화두는 리사이클링이다. 판매한 그릇중 지금 사용하지 않거나 깨진 것을 모아(홈페이지에 공고를 올리면 고객들이 공방으로 보내준다) 컬러 시리즈를 제작하는 것. 파란색 병은 재생의 의미요, 모든 컬러 제품은 인종이나 민족에 관계없이 조화를 이루며 살자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자신을 믿으면 무엇인가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지죠. 끊임없는 노력이 결국 재능을 만드는 거예요. 실용 글라스는 대중을 위해, 예술 작품은 오직 저 자신을 담금질하기 위해 만듭니다.”

일본 사람들이 갖고 싶어 하는 공예품으로 손꼽히는 쯔지 카즈미 씨의 작품을 한국에서도 만날 수 있다. 오는 4월 25일부터 서울 청담동 조은숙 아트앤라이프스타일 갤러리에서 열리는 <쯔지 카즈미> 개인전에서는 컬러 시리즈를 비롯해 유리 합 등 그의 최신작을 선보인다.

[출처]행복이가득한집(2013년5월호) 기자/에디터 : 이지현 / 사진 : 이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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