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시간은 모든 것을 부스러뜨린다. 인생도 사랑도. 어쩌면 시간 자체도. 그렇다면 진작에 몸을 잃어 과거의 것이 된 기억을 다시 불러오는 일이야 말로 가장 무모하고 무엇보다 덧없을 것이다. 모든 것의 유한함을 애석해 하는 사람들은 곧 붕괴될 사물의 속성에 영원성을 입히는 방법을 고안했다. 재현, 복원, 복각, 재해석… 하지만 낱말들은 난무하고 개념은 모호하며 과정은 오리무중일 따름이다.
정구호가 생각한 방법은 원형을 방부 처리한 다음 금빛 갑옷 같은 지금의 사조를 입히는 것이다. 아버지가 차던 시계 다이얼이 시간의 선분 위에서 어느 새 그을린 듯 익을 때처럼, 원래의 물성에 세월이 얹히면 사물은 전혀 다른 성분을 보여줄 것이다.
한국 클래식에 대한 정구호의 몰두와 탐구는 익히 잘 알려진 것이다. 백골동으로 제작한 첫 번째 반닫이 전시는 변환될 수 없는 몸의 외피를 바꾸는 작업이었다. 반닫이의 전통적 주재료인 느티나무와 소나무를 그 흔한 공산품인 인조 대리석으로 바꾸고, 원래의 방식 그대로 제작한 장석을 고스란히 재배치했다. 천 년 전의 별빛이 오늘을 비추듯 수백 년 된 반닫이의 역사가 시간을 건너 뛰어 공교로운 컨템포러리가 된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심화된 모더니티의 새 얼굴을 보았다.
반닫이는 고졸하고 검박하며 범절이 있는 여염집에서 오랜 기간 상속되던 가구였다. 가문의 귀중한 것들과 상징, 차마 버리지 못하는 것들을 담던 이 육중한 ‘수납장’은 누대를 거쳐 가문의 기틀을 보관하던 품과 같았다.
이번 전시에서 정구호가 다시 찾은 재료는 플라스틱. 문명의 선물이자 대량생산의 총아이면서 너무나 흔해 중한 줄 모르는 플라스틱은 또다시 정구호를 사로잡았다. 그 위에 모든 빛이 통과하는 투명 플렉시 글라스 강화 플라스틱은 하나의 발명과 같았다. 유동성과 상호보완을 통해 구소재와 신소재를 혼합하면서도 형태는 그대로 지켰으니 모습의 고유함만이 따로 돌올할 것이다.
안이 비치는 투명 반닫이는 어둑하게 구획된 공간 안에 은닉돼 있던 사물들을 빛 아래 드러낸다. 기실, 닫힌 것을 열고 갇힌 것 을 꺼내 바깥의 빛을 안겨 주는 것이야 반닫이의 목적 아닌가. 층층이 싸여 천장에 다다르는 투명 반닫이를 보고 있으면 크립튼 행성에서 온 슈퍼맨이 아버지를 만나던 수정 동굴이 생각난다. 반닫이의 기묘한 투명함은 홀로그램을 닮아서 부피를 덜어낸 중 력 위에 새로운 차원으로 떠오른다. 눈 앞에 번연히 존재하는 데도 모서리의 윤곽이 사라지다니, 미니멀리스트로서의 정구호의 장기가 여지없이 작렬하는 순간이다. 그럼 어쩐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정구호가 말하려는 것과 미처 말하지 못한 것까지.
워낙 장석 공예는 보존해야 마땅한 역사 속의 오브제였으나 세태의 찰나 속에서 열외되고 말았다. 장석을 만드는 장인의 테크닉은 기술적으로 심오한 경지였으되 스피릿은 완고해 찾는 이가 적었다. 설사 찾았다 한들 그 희소함에 지불하기에는 도저히 녹록치 않았다. 하지만 퀴퀴한 옛날이 새 시절의 경쾌한 빛깔을 입는다면….
전에는 전통과 현재성 사이의 투과성이 너무 두터워 서로 넘어오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구호는 나전과 화각처럼 다 다음 전시에 쓰일 재료들을 이미 나열하고 있었다. 정구호에겐 늘 강박 같은 두 가지 의무가 있었다. 가치가 우뚝하나 존재감 을 잃은 추억을 호명하는 것. 클래식을 지탱하면서 지금을 고명처럼 올려두는 것.
정구호는 그렇게 정신성과 물성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시간의 비율
글.이충걸 GQ KOREA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