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김춘환, 너무 과해서 감당하기 힘들다?

대량소비주의 시대에서 물질은 사고의 과정 없이 구매되어지기 위해 존재한다. 물건은 가격의 높낮음과 상관없이 대량경제 안에서 그 가치를 빠르게 상실하고 폐기되어 진다는 사실을 우리 대부분은 잊고 있다. 작가 김춘환은 예술의 체계를 완성하여 그것을 통해 사물에 대한 인간의 열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잡지나 개인적인 편지에서 추출한 산물을 구겨 패널에 고정시켜서 재료들을 집적한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작가는 자신이 추구하는 두껍고 복잡한 이미지를 완성한다. 그는 이 같은 행위를 통해 제재소를 운영하시던 아버지가 나무판을 다듬던 모습을 바라보던 자신의 기억을 모방한다. 엄청난 양의 광고 인쇄물로 만든 고도로 조밀 복잡다단한 표면을 통해 작가는 관람객들에게 일상에 내재된 이미지 포화의 부조리함을 보여준다. 동시에 광고물에서 차용한 형상화된 이미지 조각조각들을 인상적으로 배치하여 관람객으로 하여금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매체에 대한 작가의 참여와 개입을 감지하게 한다. 그는 콜라주를 통하여 자신과 이미지와의 관계를 정립하고 각각의 이미지는 기억의 한 조각을 구성하고 전체의 콜라주는 기억에 대한 작가의 재현임을 보여준다.

 

작가의 작업 프로세스로 말미암아 작품의 표면은 압도적일만큼 두껍다. 어떻게 저런 두께의 인터페이스가 완성될 수 있는지 관람객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동시에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의 작품은 우리 의식 안으로 과잉 공급되고 있는 이미지에 대한 조롱이다. 희화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오브제가 아닌 이미지에 압도된다. 이미지는 절단 과정을 거치며 훼손되지만 최신 패션과 자동차, 보석 등의 광고와 함께 회람되는 잡지가 존재하는 문화권의 사람이라면 동양이든 서양이든 상관없이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채는 것은 어렵지 않다. 작가와의 대화에서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며 프로세스 중심적 접근을 강조했고 작품이 지니는 상업적 의미를 최소화시켰다. 비록 작품 표면에서 개별의 오브제를 구분해내는 것은 힘들지만 그 안에 자리 잡은 작가의 사회 비판은 거침없다. 작가의 시각적 전략이 사회 비판에 적극 개입될수록 그 전략은 더욱 강력해지고, 정치적 요소를 작품의 구성 요소 하나로 이해할 때 그의 작품은 보다 흥미로워진다.

 

그러나 작가의 사회적 개입을 그의 지극히 정교하고 세련된 시각 지능과 분리해 생각할 수는 없다. 대부분의 경우 그는 인쇄물의 내용을 관람객이 알아 볼 수 없도록 처리한 후 작업에 사용한다. 대신에 우리는 작가가 프레임 안에 배치한 수많은 낱장의 종이로 구조화된 거대한 추상 패턴과 마주하게 된다. 사회 비판을 위한 선택은 결과적으로 거친 아름다움을 드러내며 놀랍도록 효율적인 추상 이미지로 변신한다. 김춘환은‘광고 인쇄물과 잡지는 우리 일상의 한 단면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술의 한 형태이다. 이 안에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입고 즐기는 방식의 생생하게 담겨있다. 나는 이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싶다.’라고 말하고 있다. 놀랍게도 작가가 콜라주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일상의 묘사와 밀접하다. 콜라주 기법은 복잡하고 미술사적으로 정의된 예술적 행위지만 결국엔 보통의 인간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잡지에서 찢겨져 나온 낱장이 구겨지고 캔버스 위에 한 장 한 장 고정되면서 작품의 파사드는 완성된다. 풀로 종이를 붙이는 행위는 작품 전체의 게슈탈트 안에서 작가가 창조해낸 자아와의 대화라고 작가는 말한다.

 

대다수는 아니지만 꽤 많은 작가들이 작업 프로세스와 자아에 대한 지각에 밀접한 상호 연관성을 부여한다. 김춘환은 방법론에 있어 단순화를 의도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자신의 창작 전략에 투영한다. 이미지를 전체성 안에서 관조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도리어 ‘그들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즉,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정의 내릴 수 있는 광고 이미지 안에서 인간의 이 같은 면면들을 재현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비록 종이를 자르는 행위가 매우 파괴적인 행위일지라도 이것은 이미지적 자유를 유도하기 위해 일정한 폭력성을 부과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작가는 자신의 예술 세계가 보다 개방됨을 확신한다(우리는 작가가 현대인의 일상 행위의 한 부분으로 동사‘즐기다’를 썼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또한 그의 작품은 찰나의 순간 속에서 우리 시대의 이페메라(Ephemera)를 저장해둔 각 개인의 기억의 보관소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일상의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자신의 기법에 변화를 주고 형태 (종종 감춰진 형태) 자체에 집중한다. 때때로 김춘환의 기법은 제한된 공간 내부를 폐기물 혹은 바이올린과 같은 값비싼 오브제로 가득 채우는 프랑스 예술가 아르망(Arman)의 아상블라주(Assemblage)에서 차용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사회적 비평과 미학적 서술, 둘 모두를 위한 균형적인 언어를 탐구하며 그는 현대미술계에서 독창적이며 독립적인 자신만이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강력한 질감의 콜라주 표면은 도발적이며 동시에 위안을 주는 추상적 요소이다. 각각의 종이는 원형이나 나선형 혹은 뾰족한 퍼즐 같은 명확한 패턴 아래 배치되어 전체적인 게슈탈트를 완성하지만 목적성을 상실한 무질서한 표면이 주는 작품의 질감은 관람객을 혼란에 빠트린다. 작가의 시각 지능이 갖는 완전한 독창성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는 그는 여전히 사회 현실의 실태를 반영하는 재료를 통한 작업 같은 보다 심도 깊은 무언가를 갈구한다. 실제 이미지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그것은 분명 거기에 있고 거대한 예술 작품의 한 요소로서 그것의 기능 안에 갇혀있다. 볼 수 없는 것은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됐다. 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해 상징적 행위와 집단적 태도의 가면을 쓰고 있는 우리의 내적 자아, 즉 사고와 감정을 탐색할 수 있다. 작가는 예술을 단순한 물리적 과정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탐구를 위한 개인의 노력과 시도임을 믿는 일종의 탐험가로 인간의 내적 삶에 호소하는 작품을 구현하고 있다. 작가 김춘환이 요구하는 것은 물질 그 이상이 되어버린 그리고 깊은 통찰의 대상으로 조금씩 자신의 위치를 바꿔가고 있는 버려진 종잇조각들로 지탱되어 있는 물리적인 공간에 대한 성찰이다.

 

조나단 굿맨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이자 기자이며 강사이다. 현재 뉴욕 브룩클린에 위치한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현대 미술 평론과 순수미술 석사 논문을 지도하고 있다.

 

 

 

메타포로서의 물질성

 

우편함을 열 때마다 자신을 맞이하는 것은 가족이나 친구에게서 온 편지가 아닌 상품 구매를 재촉하는 광고물이었다고 작가 김춘환은 적는다. 지난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의 경제 규모는 지속적으로 증가했으며 그 중 몇 년 간은 기적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빈곤 국가에서 건실한 중산층이 존재하는 부유한 산업국가로 변모했고 세계적 경제 불황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경제는 꾸준히 성장해 나갈 것을 보인다. 그러나 이 같은 경제 번영은 소비주의를 동반한다. 소비주의는 기존 전통사회와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유시장 모델로 이동한 국가의 예처럼 오늘날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이 같은 과도기의 부산물 중 하나가 바로 광고의 기하급수적 증가다. 광고는 주입된 욕망과 수요의 창조 그리고 충동적 소비와 더불어 생산에 자극제가 되고 더 나아가 경제 성장을 촉진한다. 우리 삶 구석구석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매드맨(Madmen, 2007년부터 2015년까지 미국에서 방영된 드라마 시리즈. 1960년대를 배경으로 최고가 되기 위해 발버둥치는 광고인들과 광고회사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드라마 시리즈 – 역주)은 신기술을 등에 업고 국경을 뛰어넘어 우리를 조정하며 시장의 냉소적 가치에서 비롯된 무책임한 일회성, 고갈, 오염의 에토스를 지속적이고 설득력 있게 구축하고 있다.

 

김춘환 작품의 도발적인 형(形)은 우리를 공격하는 정보와 이미지의 무차별적 전송에 대한 작가의 답변이다. 화가로 먼저 알려진 그는 서울과 파리에서 공부하고 현재 대부분의 시간을 파리에서 보내고 있다. 그의 작품은 우리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고 있으며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투사하는 광고와 그것의 교활함을 비판하기 위한 플랫폼이다. 잡지, 신문, 전단지, 브로슈어는 작가의 주제이자 오브제이며 뮤즈이다. 작가는 매체로써 광고 인쇄물을 사용하는데 아이러니하게 기능이 변환된 인쇄물이 함축하고 있는 개체의 풍부성, 편재성 그리고 폐지로 귀결되는 급속한 추락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그의 작품은 형식과 내용의 매끄러운 조합니다. 그와 같이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는 작가들에게 쓰레기는 환원되고, 재활용되고 새로운 용도에 맞춰 재구성될 수 있는 재료의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은 원천이다.

 

작가는 자신이 수집한 잡지의 광고 인쇄물을 한 장 한 장 추려낸 다음 모아 둔 신문 광고지를 덧붙인다. 그 다음 그 종이를 구기고 접고 자른다. 작가는 종이를 살짝 구기기도 하고 반듯하고 단단하게 접거나 마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처리한다. 작업 구성에 필요한 모듈 역할을 하는 이 구조화된 유닛은 작품에 맞게 질감과 크기가 부여되어 저부조(Bas-relief)처럼 사방에서 볼 수 있는 일종의 조각으로 변신한다. 작가는 콜라주야말로 자신이 가장 선호하는 기법이라고 말한다. 콜라주는 작가로 하여금 현실의 재료를 통해 예술과 도피적 환영성 사이의 연결고리, 즉 작가 고유의 즉각적으로 전이된 표상을 가능케 한다. 그는 압도적인 두께감이 살아있는 표면을 완성하기 위하여 지지대 위에 콜라주 유닛을 붙인다. 그만의 레디메이드(Ready-made) 위에 인쇄된 이미지는 작가의 처리 과정을 거치며 부분적으로 지워지고 낯설어진다. 이미지의 정체성과 의미는 혼란스러워지고 방해받게 된다. 그는 이미지를 회화적 요소로 고려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것을 물질주의의 예시로서, 무엇이 실재인가에 대한 파편으로 정의한다. 광고 인쇄물과 잡지는 그 무엇보다 우리의 삶을 생생하게 대변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는지 무엇에서 즐거움을 느끼며, 어떻게 그것을 느낄지를 매우 효과적으로 포착한다. 그는 이 같은 재현을 매우 직접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작품의 강렬한 물리적 존재감은 전체적으로 설정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시각적으로 두드러지며, 더할 나위 없는 형식미를 보인다. 그는 색과 형태의 관계성에 극도로 예민하고 그 과정과 가능성에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그의 몇몇 작품은 거의 모노크롬에 가까우며 추상적인 것과 재현적인 것, 언어적인 것과 구상적인 것 사이를 공명하는 파상형의 패턴은 마치 물과 바람의 너울거림 같은 자연의 힘을 연상시킨다. 이외 작품들은 다양한 색채감을 드러낸다. 전체적으로 규칙적인 패턴에 따라 구조화된 것을 차치하고 본다면 종이를 말아 만든 작은 튜브를 바닥에 붙은 수백 개의 담배꽁초처럼 십자형의 크로스-해치드 패턴에 따라 고정시킨 작품은 재스퍼 존스를 연상시킨다. 어떤 작품은 형식에서 보다 자유롭다. 뭉친 종이의 얼룩덜룩함은 매우 표현주의적이며 표면이 마치 살아 벌떡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시대의 현안을 비판하듯 그의 작품에는 추상회화부터, 콜라주, 아상블라주, 아르테 포베라, 프로세스와 개념주의 그리고 오늘날의 환경미술까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의 엄선된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예술에 있어 오브제는 주관적이며, 동시에 교착화된 성과물이며, 형언할 수 없는 문화의 전형이자 절대적인 소비재로 매우 다양한 면면을 지니고 있음을 김춘환과 같은 예술가들은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예술과 상품화, 예술적 감식안과 소비주의, 동경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과 시장 사이의 간격을 도발적으로 협상하는 비평가이자 수호자인 것이다.

 

평론가 | 릴리 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