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극우적(極右的)이고 과잉인 이미지들은 어떻게 정화(淨化)되는가

심상용(미술사학 박사/동덕여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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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누보 레알리즘의 한 경향인 벽보파(Affichists)는 우리가 ‘도시’라 부르는 공간, 권력과 억압의 응집체, 카인의 두려움이 출발시킨 삶의 양식, 미학적 빈곤의 늪지이기도 한 그것에 주목했다. 그 공간은 우리에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신의 논리로 기획되고 재단된 삶을 증여한다. 삶의 양식으로 포장되는 것들이라야 고작 집단학습과 그것의 모방 재현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도시의 삶은 이미 사람이 견딜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지만, 물고기가 물을 인식하지 못하듯, 다만 그 유독성이 충분히 인식되지 못할 뿐이다. 벽보파 화가들은 이를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고 맞섰다.

도시를 뒤덮은 온갖 광고 이미지들, 전단지, 포스터, 벽보, 곧 ‘도시의 피부’에서 영감을 얻었던 보파와 같은 맥락에서, 김 춘환의 작업은 대중잡지를 점령한 욕망과 만연한 소비주의에서 시작된다. 대중잡지의 원색적인 낱장들은 고스란히 현대적 삶의 단면이다. 소비주의의 영성체를 받아먹은 현대인의 삶은 광고된 신상품을 얼마나 신속하게, 빠짐없이 구매하는가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갈린다. 소비주의는 보파 화가들이 특히 문제 삼았던 제국주의와 패권주의의 완결판인 것에 더해, 물밀 듯 쇄도해오는 미국적 삶을 구성하는 핵심부품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인식과 대응이 김 춘환 세계의 미학적 기반이다.

벽보파 작가인 자크 빌르글레(Jacques Villeglé)는 도시 전체를 뒤덮다시피 한 포스터와 벽보의 이미지와 문자들에서 도시와 문명의 실체를 보았다. 그리고 그것들 가운데 일부를 수집해 그 상태 그대로, 또는 더 찢거나 변형을 가해 제시했다. 프랑세 모옝 대로(Boulevard Francais Moyen)의 벽에 부착되었던 포스터들, 문자들, 익명의 행인에 의해 쓰인 것이 분명한 낙서들, 색들에는 정치적 메시지 뿐 아니라 미적 정취도 흠뻑 배어 있다.

김 춘환의 이미지들은 상업적 인쇄물들, 특히 패션잡지에서 찢겨져 나오고 구겨진 것들의 재부착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의 작품들이 ‘콜라주 회화’로 통칭되는 이유인데, 사실 이는 이 세계 전체 가운데 절반의 진실에 불과하다. ‘재료의 연금술’이라는 개념도 다른 전제가 없이는 오독(誤讀)의 개연성이 크다. 뜯기고, 찢기고, 구겨진 잡지의 페이지들을 중립적인 ‘재료’로 범주화 할 수는 없다. 그 각각의 것들은 재료로서가 아니라 미적 단위로서, 사용되는 대신 발화한다. 그의 ‘콜라쥬-회화’를 재료처리와 관련된 일종의 질서지우기로 전락시켜선 안 되는 이유다. 이 세계의 정수는 콜라쥬(collage)만큼이나 데콜라쥬(décollage), 즉 붙이기만큼이나 붙이기 이전의 떼어내기에 있다. 실제 작가는 전체 작업 과정 중 적절한 종이를 고르는데 절반의 시간을 보낸다. 찢겨진 낱장들을 붙여 “두터운 색채로 묘사한 추상화처럼” 보이도록 하는 과정은 상업 잡지를 낱장으로 뜯어내어 해체시키는 데콜라주의 그것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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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춘환은 벽보파 화가들이 길거리의 포스터를 찢거나 변형시킴으로써 문명의 오류를 고발하고자 했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상업적 잡지들을 분해하고, 찢고, 구기고, 칼이나 톱으로 대패질하듯 표면을 잘라내기도 한다. 화려한 인쇄물들, 잡지의 현란한 낱장들의 소비주의가 시지각에게 범했던 과도한 교란을 단죄라도 하듯! 그리고 그 단죄로부터 정화의 볕이 들기 시작한다.

김 춘환이 현대가 쏟아내는 극우적 정보와 이미지를 대하는 그런 거친 방식은, 예컨대 드골의 정치노선에 대한 지지를 의미하는 ‘OUI’-영어로 YES의 의다-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찢겨진 상태로 제시했던 빌르글레의 접근과 맥락적으로 닿아 있다. 벽보파의 또 다른 화가인 레이몽 앵스(Raymond Hains)의 <이 남자는 위험해(Cet homme est dangeruex)>도 같은 맥락에서 언급할 만한 데, 이 찢겨진 포스터의 주인공은 피에르 푸자드(Pierre Poujade)라는 인물로, 알제리와의 식민전쟁을 벌이던 프랑스의 식민정책을 찬미했던 사업가다. 앵스는 푸자드의 벽보를 찢은 익명의 행인들을 빌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피력했던 것이다.

김 춘환이 보여주는 버려진 패션잡지, 광고 인쇄물들의 잘려나간 단면은 그 자신이 그리고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계와 문명의 단면이다. 빌르글레와 앵스가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치던 도시의 벽보에서 당대를 관류하는 미학적이고 정치적인 함의를 확인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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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점만큼 차이에 방점을 찍을 차례다. 김 춘환의 세계는 빌르글레나 앵스의 찢겨진 포스터에 배어있는 선현한 정치적 메시지를 앞세우지 않는다. 이 세계가 가담하고 참여하는 방식은 훨씬 연금술적이다. 선언이나 강령은 이 세계가 발화하는 방식이 결코 아니다. 그렇더라도, 그것이 이 세계를 “모노크롬의 추상회화를 연상시키는” 어떤 것으로 마음껏 편입시켜도 된다는 것을 뜻히는 것은 아니다. 김 춘환의 작품들을 국내에서 ‘열풍을 일으켰던’ 작금의 어떤 ‘모노크롬-미니멀리즘’ 미학의 편린이나 연장으로 슬쩍 밀어 넣으려 드는 것이야말로 경계해야 할 독해다.

이 세계에서도 벽보파의, 누보레알리스트들의, 더 나아가 자신의 문명을 향해 외치는 사람들의 역사와 마주하는 것이 가능하다. 다만, 그것이 컨텍스트에서 뜯겨져 나온 것들의 ‘콜라주-마티에르’가 만들어내는 넘실거리는 뉘앙스의 형태로, 구겨지고 겹쳐진 채인 결들의 저 깊은 데서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강렬하거나 부드러우며, 세련되거나 거친 물화된 표면에만 시선을 제한하는 대신, 콜라주-마티에르의 저 안으로부터 올라오는 배음(背音)을 듣기 위해 청력도 함께 사용할 것이 권장된다.

 

큰 틀에서 보자면 사실상 작가의 역할은 변하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버려지거나 방치된, 가난한 것들에서 진실을 직관하도록 하는 힘의 요소를 발견하고, 그것들에 정제된 질서를 부여해 그때까지의 주류 질서에 도전하는 것이다. 김 춘환의 세계 역시 친구로부터 건네받은 여러 뭉치의 과월호 대중잡지들에서 시작되었다. 이 영역에선 꽤 익숙한, 그 시작에서 역사와 문명의 값진 진전이 허용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