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바람이 손을 놓으면

 

 

 

 

권혁근 작가의 연작 제목이 시적(詩的)이다. 당나라 시인 사공도의 이십사시품을 따라가보면 한창 개울가에 푸릇한 물이 오르고 연한 올리브색 잎들이 튀어나올 때 즈음이 섬농이 아닐까 싶다. ‘바람이 손을 놓으면’ 이라는 구절을 타고 작품을 보니 이십사시품의 섬농(纖穠)이나 기려(奇麗)가 겹친다. 다소 어려운 말 같지만 이는 사공도가 분류한 시 창작의 품격이라고 할까 오늘날 말하는 비평의 범주들이자 비평어들이다. 가만히 뜻을 새겨보면 권혁근 작가가 손을 사용하여 도달하려는 예술의 세계를 음미하게 하고 그 세계를 해설해 주는 것 같다. 옛날에는 시.서.화 구분이 의미없었으니 이를 오늘날에 적용하여 시적인 언어를 곧 시각의 언어에 적용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작가 스스로 자신의 작품은 치유의 과정이자 그 결과물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므로 몸과 마음의 언어가 서로 몰입되어 시각의 언어로 번역된 캔버스는 촉각이 살아 있고 바람이 무성하게 지나가는 아름다운 심상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여기 작품들은 그 자체가 작가 자신의 고유한 노래 시(詩)인 것이다.

 

우연적이고 자동적인 몸짓을 창작의 주된 기법으로 활용하고 있는 권혁근의 작품은 전형적으로 작가중심의 주관적인 작품인데 예술가 자신이 리트머스가 되어 세상과 내면의 사건을 흡수하고 이를 다시 시각언어로 번안하는 추상표현주의적인 작품이다. 무용수처럼 권혁근의 작업은 작가 몸이 매우 결정적인 작품의 도구이자 내용이 되고 있다. 손가락으로 색을 밀어내면서 생기는 일정한 방향과 높낮이는 색이 지나간 길이 겹치면서 독특한 공간감을 만들어내며 군무(群舞)같기도 하고… 그 자체로 색의 커튼이 바람에 찰랑거리는 것 같기도 하다. 때에 따라 격심한 바람도 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캔버스와 대면한 몰입과 몸짓이 움직이는 감각의 풍경 하나를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작품의 표면에는 핑거프린팅의 촉각이 그대로 남아 있다. 권혁근의 이 감각의 풍경 ‘바람이 손을 놓으면’은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아주 분명한 아시아적인 상상력을 구사한다.

 

그의 작품은 구체적인 풍경인 듯하다가도 비구상적인 추상의 전개이기도 하고 우연과 몰입에 맡기는 것 같지만 상당한 훈련과 연습을 통해 도달하는 질서와 규칙이 보인다. 시간이 상당하게 걸리는 제작기간과 이 기간 동안 작품이 견디고 무엇인가를 유지케 하는 채비라고 할까 혹은 작가가 밑 작업으로 준비하는 모든 노동은 침착하고도 철저한 계산을 통해 마련된다. 손으로 올리는 저 물감의 무게를 지탱하면서도 물감의 누수와 흐트러짐을 막으며 진행되는 무작위의 작위는 매우 긴 탐색과 훈련을 거친 결과임이 분명하다. 결국 ‘바람이 손을 놓으면’ 연작은 지극히 주관적으로 자신의 심상을 해석하지만 객관적인 물질의 언어로 이를 담아내는 유연하면서도 개방적인 태도가 바탕이 되고 있는데 이 점이야 말로 아시아적인 상상력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권혁근 작품에서 보이는 재료의 해석과 기법의 발견에는 그가 거쳐 온 한국화 배경이 아주 큰 장점으로 작용한 것 같다. 수묵의 격조와 농담의 격정을 다른 재료 즉 캔버스와 유화에 흡수하는 대범한 기량과 추상의 심상풍경에 손끝의 촉감이 살아나는 바람이 늘 지나가게 하는 물질감과 개방성은 동아시아의 상상력과 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권혁근의 이 자유로움이 어디까지 가 닿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캔버스의 바람에 찍힌 그의 지문이라 할까 몸의 각(刻)이라 할까 그 촉각의 인장이 어떤 변용물에도 담겨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된다.

 

대구예술발전소 소장 남인숙